기억해야 할 사람 그리고 메시지 - 518민주화운동 - 특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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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 기억해야 할 사람 그리고 메시지

5·18 민주화운동 (광주 민주화 운동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 기간 : 1980518~ 527(10일간)

▶ 장소 : 광주광역시 일원

▶ 성격 : 군부 독재(전두환 신군부)에 항거한 시민 민주화 운동

▶ 공식 명칭 : 5·18 민주화운동 (2002년 국가기념일로 지정)

▶ 2021년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 5·18 민주화운동 배경

1979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

19805, 전국적으로 학생·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신군부는 계엄 확대를 선언하며 탄압을 시작.

광주에서는 학생 시위가 가장 강력하게 일어남.

 

2. 5·18 민주화운동 사건의 전개

▶ 5월 18일 :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확대에 반대하며 시위. 계엄군(특전사)이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

▶ 5월 19~20일 : 시민들이 대거 합류.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급증. 시민들은 무기고를 열어 시민군을 조직.

▶ 5월 21일 : 최악의 유혈 진압.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 (이날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

▶ 5월 22~26일 : 시민군이 광주를 장악하고 시민자치를 실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질서를 유지.

▶ 5월 27일 : 새벽,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상무충정작전’)으로 광주 완전 진압.

 

3. 5·18 민주화운동 희생 규모

▶ 공식 사망자 : 207(정부 발표).

▶ 실제 추정 : 사망·실종 포함 400~2,000명 이상 (학계·시민단체 추산)

▶ 부상자 : 수천 명.

성폭력, 고문, 불법 매장 등 잔인한 만행도 다수 발생.

 

4. 5·18 민주화운동 역사적 의미

▶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 : 19876월 항쟁의 직접적 불씨가 됨.

군부 독재에 대한 시민 저항의 전형을 보여줌.

오랜 시간 왜곡과 은폐를 겪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진실 규명 운동이 시작됨.

▶ 2002년 : 국가기념일로 지정.

▶ 2011년 : 5·18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 제정.

▶ 2021년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역사적 진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음).

 

☞ 5·18은 단순한 지역 사건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뿌리 ⤑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과 함께, 매년 5월 광주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음

5. 5·18 민주화운동 - 기억해야 할 사람

☯ 윤상원 (尹祥源, 1950~1980) — 5·18의 상징, 마지막 대변인

☞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던 지식인이자 시민군 대변인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버리고 광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들불야학(夜學)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민중 교육에 헌신.

시민군의 핵심 지도부로 참여하여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대변인 역할

526일 밤, 계엄군의 최후 진압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며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림.

19805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에서 총격을 받고 31세의 나이로 산화.

 

☯ 박관현 (朴寬賢, 1953~1982) — 들불야학의 동료, 단식으로 쓰러진 열사

☞ 1980년 5·18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광주 시위의 초기 학생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

윤상원과 마찬가지로 들불야학에서 강학(講學)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민중 교육에 앞장섰음.

5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전 도피하여 5·18 항쟁 현장에는 직접 있지 못했지만, 이후 2년간 수배 생활을 이어가며 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을 계속함.

19824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박관현은 재소자 처우 개선과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50일간 3차에 걸친 단식투쟁을 전개.

19821012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으로 29세의 나이에 옥중 사망.

 

☯ 박기순 (1955~1980) - 여성 활동가의 표상

☞ 사무직 근로자. 시민군 활동가

부상자 구호, 식량·의약품 조달 등 후방 지원.

윤상원과 함께 항쟁 기록 정리 및 외부 전달 시도.

시민군 회의 참여, 민주주의 요구 연설.

1980527, 윤상원과 함께 도청 분수탑 앞에서 전사 (향년 25).

 

☯ 홍남순 (洪南順, 1912~2006) — '광주의 변호사',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

☞ 5·18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법조인

단순히 법정을 지킨 변호사가 아니라 몸으로 항쟁에 뛰어든 실천적 지식인.

1912년생으로 당시 이미 68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521일 서울에서 광주로 직접 달려와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

신군부는 그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내란수괴"의 혐의로 체포하여 무기징역을 선고.

석방 이후 광주 5·18 구속자협의회 회장, 5·18 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5·18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평생을 헌신.

200694세를 일기로 별세.

 

☯ 정동년 (鄭東年, 1943~2023) — '5·18 사형수', 평생을 5·18과 함께

☞ 1964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를 주도한 것을 시작으로 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

5·18 당시 적극 참여하여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어 복역.

출소 후에도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르며 민주화운동을 이어갔으며, 5·18기념재단 이사장으로서 5·18의 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데 헌신.

 

☯ 이성학 (李成學) 장로 — 독립운동가 출신, 항쟁의 어른

☞ 이성학 장로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출신

5·18 당시 광주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 중 한 명.

1978 광주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5·18이 발발하자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핵심 지도부로 참여.

3·1운동 주모자 중 한 명이기도 했던 그는 계엄군과의 협상 과정에서 시민들을 대표하는 도덕적 권위를 지닌 인물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재.

 

☯ 조철현 (趙哲鉉) 신부 —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종교적 버팀목

☞ 5·18 당시 광주 가톨릭 사제

이성학 장로와 함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한 핵심 인물 중 한 명.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서 협상을 시도하고 희생자를 구호하는 데 앞장섬.

"더 큰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도청 주변에서 무장 해제를 설득하는 어려운 역할을 떠맡았음.

 

☯ 박남선 — 시민군 상황실장,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킨 사람

☞ 5·18 당시 광주에서 골재 납품업을 하던 평범한 시민

1980519, 동생 박남규가 공수부대원에게 몽둥이로 폭행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항쟁에 참여.

이후 시민군 상황실장으로서 도청을 거점으로 한 시민군의 활동을 지휘.

527일 새벽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있었음.

5·18의 마지막 증인 중 한 사람으로, 훗날 항쟁의 진실을 증언하는 데 헌신.

 

☯ 윤한봉 (尹漢鳳, 1941~2007) — 5·18의 마지막 수배자

☞ 1970년대 광주 지역 학생·노동운동의 총책으로 활동한 핵심 활동가

들불야학 창설에도 깊이 관여한 인물.

5·18이 발발하자 신군부는 그를 "내란음모죄"의 주모자로 지목하여 전국에 현상수배.

527일 도청이 함락된 뒤 그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오랫동안 은신하다가 미국으로 망명.

무려 13년간 수배 상태를 유지하다 1993년 마지막으로 수배가 해제된 뒤 귀국.

귀국 후에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5·18에서 산화한 동료들의 정신을 기리는 데 남은 생을 바침.

 

☯ 안병하 (安秉河, 1928~1988) — 발포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

☞ 5·18 당시 전남경찰국장

신군부의 발포 명령에 정면으로 저항한 양심의 인물.

계엄군의 강경 진압 방침에 맞서 "공격 진압보다 방어 진압을 우선하라", "가혹행위를 절대 하지 말라"는 지침을 부하들에게 내렸음.

신군부에 의해 보직 해임되고 온갖 불이익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지켰음.

 

☯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1937~2016) — '푸른 눈의 목격자'

☞ 독일 제1공영방송(ARD)의 일본 특파원

"내 눈으로 진실을 보았고, 그것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나의 직분이었다. 내 손언약(약속)은 광주에 묻히는 것이었다."

광주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5·18의 참상을 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유일한 외신 기자.

택시 운전사 김사복의 도움으로 검문을 뚫고 광주 현장에 진입하여, 계엄군의 학살 장면과 병원의 처참한 상황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음.

 "광주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2016년 사망 후 그의 유언대로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 묻힘.

 

☯ 헤닝 루모어 (Henning Rumohr) — 힌츠페터의 동행, 두 번째 목격자

☞ 위르겐 힌츠페터와 함께 광주로 향한 또 한 명의 독일 ARD 방송 기자

 녹음 담당 기자로 동행하여 광주의 참상을 소리로 기록.

촬영한 필름을 바지춤과 쿠키 상자에 숨겨 삼엄한 검문을 뚫고 독일로 반출하는 데 성공  522일 독일 전역에 방송.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데 기여한 인물.

 

☯ 김사복 (金士福, 1927~1984) — 힌츠페터를 광주로 데려간 택시 운전사

☞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모델

외신 기자 힌츠페터가 광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검문소를 통과하며 취재를 도운 평범한 서울 시민.

오랫동안 그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영화 상영 이후 그의 아들 김승필 씨가 신원을 공개하면서 비로소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음.

 

☯ 이름 없는 영웅들 : 일반 시민군과 희생자들

▶ 여성·어르신 : 양동시장과 대인시장 등의 여성 상인들은 계엄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대형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었음.

▶ 학생 ; 고등학생·대학생들이 시위 전열에 앞장서다 희생.

▶ 노동자 : 공장·현장에서 일하다 거리로 나와 시민군으로 참여.

6. 5·18 민주화운동 - 그들이 남긴 메시지

☯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526일 밤, 계엄군이 최후 진압을 위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죽음을 예견하고 외신 기자들 앞에서 남긴 도청 농성 중 시민군 대표로 작성한 최후의 선언문

☯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우리가 비록 지금은 피를 흘리고 쓰러질지언정, 우리 가슴속에 불타는 민주주의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5·18 직전인 514, 광주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 앞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토해내며 했던 민족민주화대성회 연설의 일부.

☯ 박기순 (시민군 활동가)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길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른 선택은 두려움보다 강하며, 정의는 개인적 희생을 넘어섬을 말함.

☯ 조비오 신부 (현장 증인)

"진실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정의는 늦게 올지라도 반드시 옵니다."

계엄군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국제사회에 첫 공식 증언.

☯ 홍남순 (인권 변호사 및 시민 수습위원)

"총칼 앞에 무릎 꿇는 유약한 지식인이 되기보다, 시민들의 방패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

6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의 무력 진압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시민 수습위원'으로 나서서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며 보여준 결개.

☯ 위르겐 힌츠페터 (독일 언론인)

"내 눈으로 진실을 보았고, 그것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나의 직분이었다. 내 손언약(약속)은 광주에 묻히는 것이었다."

삼엄한 통제를 뚫고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푸른 눈의 목격자가 생전에 남긴 말.

☯ 김영철 (시민수습대책위원 기획실장)

"역사 앞에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최후의 날인 526일 밤, 도청을 사수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던 중, 끝까지 남아 도청을 지키며 대의를 쫓겠다고 다짐하며 던진 말.

☯ 정상용 (외무부장 및 시민군 지휘부)

"우리가 총을 든 것은 누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입니다."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한 이유가 폭동이 아니라 무자비한 국가 폭력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음을 대내외에 천명한 메시지.

☯ 이정연 (당시 전남대 학생, 일기장 중)

"오늘도 친구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내일은 내가 그 친구의 몫까지 소리 높여 민주주의를 외칠 것이다."

항쟁 기간 동안 일기장이나 유인물 조각에 남겨진 무명 영웅들의 기록 중 하나로, 떠나간 이들의 뜻을 이어받아 끝까지 정진하겠다는 굳은 결의.

☯ 작자 미상의 시민 (가두방송 중)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도청으로 모입시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이 극에 달했을 때, 공포를 뚫고 광주 시내를 돌던 가두방송 차량에서 울려 퍼진 절규이자 연대의 외침.

☯ 양동시장 상인 일동 (주먹밥을 나누며)

"우리 아들딸들아 이거 먹고 힘내라. 우리는 너희를 믿는다."

계엄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대형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어 시민군에게 아낌없이 주먹밥을 건네던 시장 어머니들의 따뜻한 위로이자 연대의 한마디.

☯ 5월 22일자 광주시민 민주투쟁공동위원회 선언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의 요구는 정당하며,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원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신군부가 광주 시민들을 '폭도''불순분자'로 몰아가자, 왜곡된 언론과 선전에 맞서 광주 시민들의 진심과 정당성을 밝힌 대자보 및 선언문의 핵심 구절.

☯ 5·18 유가족 대표

"자식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억은 추모가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는다.

☯ 시민군과 일반 시민들이 남긴 메시지

최후의 구호 (전남도청 옥상에서)

☞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는다!”“광주 시민이여, 일어나라!”

시민군 대장 중 한 명이 남긴 말

☞ “우리가 여기서 죽더라도, 우리의 피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될 것이다.”

한 익명의 시민군이 도청 벽에 남긴 글

☞ “우리는 자유를 위해 죽는다. 우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라.”

☯ 여성·청소년·일반 시민들의 메시지

이애순 열사 (여성 시민군)

☞ “여자라고 해서 뒤에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함께 싸운다.”

한 고등학생이 남긴 메모

☞ “엄마, 미안해요.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를 사랑해요.”

 

정보에 연도나 이야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자세한 것은 각각의 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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