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아시나요-131주년 - 특별판

반응형

 

민중의 외침,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민중의 외침,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사람이 하늘이다” — 녹두장군 전봉준의 깃발 아래 모인 백성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894(고종 31)에 일어난 농민 중심의 대규모 무장봉기입니다. 백성들이 부패한 관료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 운동입니다. 단순한 농민 봉기를 넘어 조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외친 근대적혁명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동학농민혁명 배경

▶  조선 사회의 혼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민씨 정권의  친청 정책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  봉건 지배층의 수탈과 부패

 조선 후기 지주와 탐관오리의 수탈, 불공정한 세금, 관리의 부정부패가 극심해졌습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심각하여 농민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  외세의 경제적 침탈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경제적 침탈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외세에 대한 반감과 위정자들의 무능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습니다.

 

▶ 동학(東學)의 확산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사상 아래 평등, 자주,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최시형을 중심으로 동학이 전국적으로 퍼지며 민중들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제폭구민(除暴救民: 포학한 자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함)' 등의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직접적인 계기 (고부 민란)

 ▪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멀쩡한 저수지를 보수한다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막대한 수세(물 사용료)를 강탈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1894년 정월,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와 농민들이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봉기했습니다 (고부 민란).

 

2.  동학농민혁명 전개

▶ 1차 봉기 (1894년 갑오년 3월~5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로 인해 전봉준 등 농민들이 고부에서 봉기 시작합니다. 백산(白山)에서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척양척왜(서양과 일본을 몰아내자)”를 내걸고 군을 조직하여 황토현, 황룡촌 전투 등에서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전라도를 장악합니다.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이는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이 조선에 파병되는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전주화약과 집강소 설치 (18946)

농민군은 전주성 점령 후 정부와 협상하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습니다.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탐관오리 처벌, 불합리한 세금 폐지, 신분제 폐지 등 개혁을 약속했습니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각 지역에 집강소(集講所)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치안을 유지합니다. (농민 자치 기구의 성격)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및 청일전쟁 발발

 정부의 요청으로 파병된 청군과 일본군은 전주화약 체결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내정 개혁을 구실로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결국 18947월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며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 제2차 봉기 및 우금치 전투 (갑오년 9월~11월)

일본의 내정 간섭과 청일전쟁 발발에 분노한 농민군은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왜를 배척함)'구호로 다시 봉기했습니다. 1차 봉기가 봉건제 개혁 성격이 강했다면2차 봉기는 반일 구국 운동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남접(남접(전봉준 계열)과 북접(손병희 계열)연합하여 논산에 집결, 서울로 북상하려 했습니다.

 

▪ 공주 우금치 전투(11월)

공주 우금치(牛金峙)에서 일본군과 정부군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역부족이었습니다. 이후 농민군은 해산되고 전봉준은 체포되어 1895년 처형됩니다.

 

3. 동학농민혁명 의미

▶ 민중 주도의 개혁 운동

백성들이 주체적으로 부패와 외세에 저항한 운동이며 전근대적인 봉건 체제에 균열을 가한 근대 시민운동의 출발점입니다.

 

▶ 자주정신의 발현

농민 스스로가 사회 개혁과 외세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항일 의병 운동 등 민족 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습니다.

 

▶ 갑오개혁에 영향

동학군의 요구와 압박으로 조정은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하며 일부가 갑오개혁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군현제 폐지, 과거제 폐지 등)

 

▶ 국제 정세 변화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한 청일 양국의 파병과 충돌은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주요 인물

▶ 전봉준 (全琫準, 1855~1895)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 "녹두장군"으로 불렸습니다,

고부 군수의 수탈에 항거하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황토현·장성·정읍 등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을 점령한 뒤, 전주화약을 체결해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일본의 개입에 맞서 2차 봉기를 일으켰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되어1895년 서울에서 순국합니다.

 

▶ 최제우 (崔濟愚, 1824~1864) 동학 창시자 (1860년)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사상을 융합한 민간 신앙 '동학'을 창시합니다

1860, 경주에서 동학(東學)’을 창시해 신분 차별 없는 평등사상을 전파했습니다.

시천주(侍天主)” 사상 하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 즉 인간 존엄을 강조하고, 탐관오리와 외세 배척을 강조하면서 민중의 정신적 지주로 떠오릅니다..

조정에 의해 사이비 종교로 몰려 1864년 처형됩니다..

 

▶ 최시형 (崔時亨, 1827~1898)

동학의 2대 교주로, 동학 교단을 재건하고 교세 확장에 힘썼습니다.

처음에는 무력 봉기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으나, 농민들의 요구와 상황 변화에 따라 결국 농민 혁명을 지지하고 북접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경전으로 용담유사, 포덕문등을 편찬하여 민중 계몽에 힘씁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무력 진압된 이후에도 동학 교리를 지키다 결국 체포되어 사형당함.

 

▶ 손화중 (孫化重, 1854~1895)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지역 지도자로 전라도 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 조직 및 군사 활동에 참여했으며, 전주성 점령, 전주 화약 체결에 큰 기여를 하고, 2차 봉기 때도 전투에 참여하였고, 패배 후 붙잡혀 1895년 처형됨.

 

▶ 김개남 (金開南, 1851?~1894)

전봉준과 함께 남접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군사 작전 총책 역할을 맡았습니다. 황토현 전투, 장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동학군의 무장 조직화에 기여했습니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보인 그는 2차 봉기(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패배 후 도피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 손병희 (孫秉熙, 1861~1922)

 동학의 제3대 교주이자, 3.1 운동의 민족대표로 최시형의 뒤를 이은 북접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2차 봉기 때 북접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의 남접 농민군과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항일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후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5. 동학농민혁명 결과 및 의의

▶ 반봉건 사회 개혁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폐지, 토지 제도 개혁 등 봉건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는 시도였습니다.

 

▶ 반외세 운동의 시초

척왜양창의 기치를 내걸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 민족 민주 운동의 뿌리

이후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군 활동 등 항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갑오개혁의 계기

동학농민혁명은 정부가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오늘날의 평가

1994,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을 공식적으로 혁명으로 인정하고, 전봉준은 민족의 영웅으로 재조명되며 국립묘지에 위패 봉안됩니다. 정읍, 고창, 공주, 전주 등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과 추모제가 열리며 2025년은 13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탐관오리와 외세를 몰아내고, 백성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민중들의 거대한 외침이었습니다.  부당함에 맞서고,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그 정신 —  지금 우리 시민 또한 다르지 않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반응형